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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북도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 수암마을.
53년 전 댐건설로 인해 마을 대부분이 수몰되어 버렸고, 뱃길이 유일한 통로였던 비운의 마을이다. 이런 수암마을이 변하고 있다. 짙은 밤안개가 저수지를 뒤덮으면 꼼짝없이 날이 밝기를 기다려야 했던 마을의 오랜 저주를 푼 것은, 바로 임도(林道)였다.
임도(林道). 글자 그대로 숲 속에 난 길이라는 뜻이다. 임도는 원래 임업 경영과 산림보호를 목적으로 일정한 구조와 규격을 갖추어 개 설한 길을 뜻한다. 예를 들어 산불이 나거나 조난 사고가 일어났을 때 산 깊숙한 곳까지 빨리 접근할 수 있도록 산 속에 길을 만든 것 이다. 하지만 전라북도는 임도에서 글자 그대로의 뜻 그 이상을 읽 어내려 했다. 이왕 산 속까지 길을 내야한다면, 어디로 어떻게 개설 해야 할지, 이를 새롭게 활용할 방법은 있는지 궁리한 것이다. 지역 을 가장 잘 아는 주민들의 이야기에 가만히 귀를 기울이고 듣다보 면, 뜻밖의 아이디어를 얻기도 한다. 게다가 수동적이던 주민들을 두 발로 움직이게 할 수도 있다.
이야기는 섬진강 줄기에서 출발한다. 일제 치하에 있던 1926년, 우 리나라 최초의 다목적 댐인 섬진강 댐 공사가 시작되었다. 임실군 으로 흘러가는 섬진강 상류를 막아 정읍으로 흘려보내 드넓은 평야 를 적셔주도록 건설된 섬진강 댐은 1965년이 되어서야 공사를 끝마 치게 된다. 이후 5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섬진강 댐은 호남에 안정적 인 용수를 공급해 왔다. 가뭄이나 홍수를 막아주는 역할 뿐만 아니 라 아름다운 풍경으로도 유명한 섬진강 댐은, 일교차가 큰 봄과 가 을에 은은한 물안개가 만들어 낸 절경으로 전국의 사진작가들을 불 러 모으는 곳이다. 또 댐을 끼고 도는 옥정호 제 1순환도로를 ‘전국 의 아름다운 길 100’으로 알려지게 하기도 했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명암이 있는 법. 섬진강 댐의 아름다움 뒤에는 이곳에 살던 주민들 의 고통이 있었다.
2012년 11월, 임실군 운암면 운정리 수암마을에 거주하던 최일권 씨 는 임실군, 전라북도, 국민권익위원회에 호소문을 올렸다. 마을에 육상통로가 존재하지 않아 배를 타고 통행하고 있어 생활에 큰 불 편함과 사고 위험이 있으니 도로를 개설해 달라는 내용이었다. 세 월을 감안해 보면 최일권 씨의 호소는 늦어도 한참이나 늦은 것이 었다. 섬진강댐이 건설되면서 살던 땅이 물속에 갇혀버리게 된 주 민들은 53년 동안 주소지도 변경하지 않은 채로 그렇게 불편을 감 수하며 살아왔다. 반세기가 넘는 세월 동안 마을 주민들은 일터로 나가기 위해 아침저녁으로 배를 타야만 했고, 심지어는 그러던 중 에 빠져 죽은 사람들도 있었다. 차라리 자연스러운 강가 마을이었 다면 아마도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불편함을 줄이기 위한 다른 대 안을 만들었을 것이다. 문명화로 인해 갑작스레 생겨난 인공 호수 가, 멀쩡한 산골 마을을 섬마을로 바꾸어 버렸으니 참으로 기구한 운명이 아닐 수 없었다.
로버트 프로스트라는 시인의「가지 않은 길」이라는 시의 마지막은 이렇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고, 나는 사람들이 적게 간 길을 택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이 내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이 시 를 임실군의 임도 사업에 인용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되지 않을까. ‘숲 속에 길을 내야 했고, 임실군은 사람들의 의견을 따르길 택했습 니다. 그리고 이것이 주민들의 삶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처음 수암마을에 희망의 빛이 비춘 것은 2013년의 일이었다. 국민권익위원회의 임도개설 권고에 따라 2014년도에 강진면 수방 마을로부터 운암면 수암마을 간에 1.4Km 구간이 개설된 것이다. 때 문에 수암마을 주민들에게도 육로가 뚫리는 셈이 되었다. 하지만 원래 예정대로라면 길은 수암마을을 그냥 지나쳐 옆 마을인 금기마 을로 바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었다.
길의 방향을 바꾼 데에는 최일권 씨의 호소도 컸지만, 귀를 열 고 이를 들어준 임실군 임도담당자와 전라북도의 영향도 있었다. 당시 전라북도의 임도사업은 새로운 변화를 맞이하고 있었다. 기존에 개설된 임도들을 연결하여 지역의 숨어 있던 곳곳을 연결하여 새로운 관광 인프라로 개발하면서도 주민들의 활용도를 높이는 임 도설치 5개년(2016~2020) 계획을 기획 중에 있었던 것이다.
길이 사람을 위한 것이듯이, 길을 내는 것도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도의 신조였다.
이렇다 할 지역 자원이나 인프라가 상대적으로 부족한 전라 북도에게, 임도 사업은 단순히 숲 속에 길을 내는 일이 아니었다. 전 라북도는 사업 기획단계에서부터 그 지역의 자원, 역사·문화, 지역 축제 등 다양한 요소들을 감안하고 연계하고자 했고, 검토과정에서 부터 심사과정에 이르기까지 노선 선정에 무엇보다 심혈을 기울이 고자 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수암마을의 사례를 그냥 무시할 수는 없었다. 필요하면 길을 돌려서라도 임도가 수암마을에 닿게끔 해야 했다. 그것이 당연한 일이었다. 길이 사람을 위한 것이듯이, 길을 내 는 것도 사람의 일이라는 것이 도의 신조였다.
사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기 전, 수암마을이 위치한 운암면에서는 수차례 주민회의가 열렸다. 회의는 주민들의 요구사항을 건의하는 자리인 동시에 설계와도 바로 맞물리는 구체적인 내용이 오고가던 자리였다. 단순한 도로가 아니었기 때문에 주민들의 기대도 컸고 그만큼 참여도 높았다.
주민회의는 계속되었고, 또 계속되고 있다. 특히 본격적인 공 사가 진행되기 전 주민들과 관계자들은 틈 날 때마다 모여 어떻게 하면 더 좋은 방향으로 길을 낼 수 있을지를 토의했다. 당시의 회의 록만 들춰 봐도 주민들이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얼마나 많은 것을 고민하고 노력했는지를 알 수 있다. 다음은 2015년 11월에 열린 회의 록 일부를 발췌한 것이다.
일시 | 2015. 11. 17 (화) 15:00~16:30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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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 | 운암면 금기리 |
참석자 | 주민 (11명), 임실군청 (2명), 운암면사무소 (3명), 사업수행자 (1명) |
내용 | 임도 담당자 : 지금부터 2016년 운정 금기간 간선임도 주민설명회를 시작하겠습니다. (중략) 용역사 : 먼저 임도노선 1안 L=3.6km와 노선 2안 L=5.3km에 대하여 검토한 결과 1안이 경제적이며 임도통행 및 산림경영에 유리한 노선임을 말씀드립니다. 노선 2안은 경작지가 있으나 암반구간이 많으며 노선 길이도 1.2km가 길어 사업비용이 많이 들것으로 판단됩니다. 주민 (최일권) : 노선 1안으로 임도를 만들어야 밭경작을 하는데 유리합니다. 수암마을 주민들도 금기리 방향으로 통행하는데 유리하니 1안으로 임도를 개설하기를 희망합니다. 임도담당자 : 수암마을은 임도에서 내려오는 경사가 급하므로 겨울철 수방마을~금기마을 간 전 노선을 이용하는데 애로사항이 많을 것으로 판단됩니다. 따라서 마을로 내려오기 전 노선 1안으로 임도를 시작하면 약 1.2km의 노선을 단축할 수 있고 사업비 절감에도 도움이 되리라 생각됩니다. 주민 (최일권) : 사업부서나 담당자 입장에서는 사업비가 적게 드는 노선으로 빨리 개통하고자 하나 주민 입장에서는 비록 1~2집 살고 있으나 주택지로 경유하여야 실질적으로 도움이 됩니다. 배가 아닌 육지로 안전하게 통행하고 싶습니다. 임도담당자 : 금기리 홍원기 이장님 생각은 어떠신지요? 금기이장 : 최일권 주민이 말씀하신 대로 육로가 없어 배를 타고 집에 가다가 배가 뒤집혀 많은 사람들이 돌아가셨습니다. 너무 불편이 많아 민원을 제기한 것이니 주민들이 원하는 노선으로 임도를 개설하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임도담당자 : 여기 용역관계자와 산에 들어가 현지답사를 하였으나 실질적으로 산 전체를 보기에는 한계가 있었습니다. 지역 주민들께서 재검토를 원하시니 특별한 사정이 없으시면 다음 주중에 지역주민 몇 분하고 현지 확인을 다시 한 후에 노선을 최종 결정하면 어떻습니까? 일동 : 찬성합니다. 임도 담당자 : 다른 의견 없으시면 현지 담사 후 적정노선을 준비하여 다시 설명회를 개최할 예정이오니 임도개설 사전 동의서 징구에 적극 협조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이상으로 주민 설명회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출처 : 전라북도 산림자원개발과
회의록에서 볼 수 있듯이 주민들은 민주적으로 자신들의 의 견을 개진했고, 공사 관계자들 또한 합리적으로 자신들의 입장을 설명하고, 의견을 조율해 나갔다. 일례로, 홍수계획선 바로 위를 통 과하도록 길을 조정한 적이 있는데, 이 역시 임도를 보다 효율적으 로 활용하고자 한 주민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비록 적은 수지만 주 민 한 명 한 명의 입장을 반영한 결과다.
주민들의 열성적인 참여와 열린 행정은 주민들로 하여금 직접 사업 을 감독하고 뛰게 만들기도 했다. 금기마을 이장을 비롯한 주민 두 명이 직접 감독이 되어 시공부터 민원 해결까지 맨발로 뛰며 사업 을 진행했다. 주민이 직접 감독이 되자 마을 사람들의 사업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졌다. 외부적으로는 뜻밖의 효과를 내기도 했다.
사실 산림 사업에 속하는 임도 사업의 경우 주민들에게 편의 를 제공하는 사업인 만큼 도로에 편입되는 토지에 대한 정부 보상 이 주어지지 않는다. 때문에 토지주가 길을 내는 것을 허락하지 않 는다면, 허락한 땅으로 구불구불 돌려서 땅을 내야만 한다. 운정리 와 같은 산골짜기 마을은 지역 주민들이 땅을 소유하고 있는 경우 가 많다. 이제는 대부분 고령으로 세상을 떠나신 분들이 대부분이 긴 하지만 말이다. 주민참여감독자들은 땅을 물려받아 현재의 토지 주가 된 자제분들을 설득하기 위해 수차례 서울로 가는 버스에 몸 을 실었다. 한 사람 한 사람 만나 일일이 협의 도장을 받고 미심쩍은 부분들을 설명했다. 길을 놓기 위해 먼 곳까지 직접 발걸음을 한 고 향 어르신들을 외면할 만큼 마음이 차가운 사람이 있을까. 뜻밖의 방문에 땅 주인들은 선뜻 합의를 해주었고, 덕분에 임도는 주민들에게 가장 최적화된 방향으로 개설될 수 있었다.
주민 감독들이 이렇게 열심일 수밖에 없었던 데는 그만한 이 유가 있다. 기존의 뱃길은 비록 이동시간이 짧다는 장점이 있긴 했 지만, 위험하기도 하거니와 농기구 등을 실어 나르는 것도 불가능 했다. 게다가 나이 드신 분들이 주민의 대부분인 상황에서 갑자기 아프기라도 하면 구급차를 불러놓고도 발을 동동 구르며 기다릴 수 밖에 없는 처지였다. 길을 놓는 일이 곧 주민들의 목숨을 살리는 일 이었던 것이다.
다행히도 2016년 임도 사업 덕분에 주민들의 삶은 많이 바뀌 었다. 각종 농기구를 구입해 임도 주변에 밭을 내고 다양한 농작을 시도해 보기도 하고, 차로 멀리까지 장을 보러 다녀오기도 한다. 이 렇게 상황이 좋아지자 귀농가구도 생겨나 다섯 가구나 임도 근처에 터를 잡았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외로운 마을에서 축제까지 열 렸으니, 마을 사람들에겐 참으로 믿기 힘든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시군 | 내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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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실 | 전국 산악자전거 대회 개최 및 옥정호 주변 섬진강 다슬기 축제, 임도 걷기 체험 |
정읍 | 옥정호 주변 지역향토자원인 대장금 마실길과 임병찬 창의 유적지를 경유한 지역문화탐방 체험 |
장수 | 장안산 도깨비 권역의 도깨비 축제, 장안문화 예술촌과의 연계 |
남원 | 아막산성과 흥부묘 구간 연결로 주민 교통로로 활용함과 동시에 지역문화재 활성화 기반 시설로 활용 |
진안 | 진안 마이산을 거점으로 진안 관광벨트화를 위한 부귀산 개발계획과 연계 |
익산 | 두동교회, 두동편백마을 등의 활성화를 위한 노선 선정 후 산림공간 기반마련 |
출처 : 전라북도 산림자원개발과
2020년 완공될 전라북도 의 임도는 다양한 관광 자원으로 활용될 뿐만 아니라, 고립되어 있던 각각의 시군을 지리적 으로 또 사업적으로도 연계할 수 있는 야무진 끈이 되어 줄 것이다
축제가 열린 섬진강 상류 지역은 물이 맑아 다슬기가 많이 난다. 1 급수에서만 자라는 다슬기를 잡고, 민물고기도 직접 손으로 잡아보 는 자연 체험 행사는 8월의 폭염에 시달리던 도시 사람에겐 꿀맛과 같은 휴식이었다. 이처럼 요즘의 임도는 다양한 환경 콘텐츠로 사 람들에게 즐거움을 주고 있다.
전라북도 역시 2020년까지 임실을 포함 5개 지역에 차근차근 임도를 정비해 나갈 계획이다. 전라북도는 특히 임실군과 같이 지 역의 깊숙한 곳까지 도달하는 미시적인 접근을 이루어 나가는 동시 에, 거시적으로는 5개 지역의 혈맥을 이어나가 하나의 노선을 완료 하려는 계획을 진행 중이다. 이를 위해 도에서는 각 시군들이 협약 을 맺고 교류하여 서로 상생해 나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주고 있다. 2020년 완공될 전라북도의 임도는 다양한 관광자원으로 활용될 뿐 만 아니라, 고립되어 있던 각각의 시군을 지리적으로 또 사업적으 로도 연계할 수 있는 야무진 끈이 되어 줄 것이다.
눈 깜빡할 사이에 건물이 올라가고 사라지는 대도시 사람들 은 차 한대 겨우 다닐 만한 너비의 임도가 주민들에게 그토록 큰 기 쁨을 준다는 사실을 이해하지 못할 지도 모른다. 그러나 산골짜기 주민들에게 임도는, 활력소이자 생명의 끈이며 삶의 터전을 지키는 수호자이다. 숲 속 깊은 곳에 있는 사람을 살리기도 하고 아무도 찾아오지 않던 마을에 사람이 오가게 하며, 무엇보다 주민들의 생활 을 변화시키는 길이다. 마치 몸 구석구석 모세혈관 끝까지 피가 돌 듯이, 임도는 국민과 국토를 수호하는 길이다.
고립된 섬마을처럼 살아야 했던 수방마을 사람들의 53년 세 월을 무엇으로 보상할 수 있을까. 그러나 주민들은 이러한 임도의 중요성을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기에 불평불만 없이 사업을 따 라왔고, 솔선수범하며 사업을 이끌어갔다. 무엇보다 처음 사업을 건의한 수암마을 주민 최일권 씨를 비롯한 수암마을 주민들은 이 작은 마을도 이제는 외면당하지 않고 당당히 목소리를 낼 수 있다 는 것을 깨달았다. 목소리가 받아들여진 경험이, 주민들이 스스로 를 지역발전사업의 한 일원으로서 인식할 수 있게 만들었다. 어쩌 면 임도를 통해 임실군이 배운 가장 큰 교훈은 이것일 것이다. 길이 있는 한 우리는 누구에게라도 닿을 수 있다는 사실. 그리고 만약 길 이 없다면, 힘을 합쳐 길을 만들면 그만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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