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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 희한한 일이다. 근사한 건물 하나가 들어서면 동네가 달라진다. 사람들이 모이고 활기가 생긴 다. 정반대의 일도 있다. 쓰지 않는 방치된 건물이 있으면 주변이 칙칙해진다. 사람들이 떠나고 흉흉 해진다. 사람들이 들고나는 건물에 생과 사의 에 너지도 들고난다. 최근 제주 건입동에는 따뜻한 사람의 이야기가 있는 건물이 들어섰다. 그 에너 지가 참으로 훈훈하다 보니, 건입동에도 모처럼 생기가 돌고 있다.
한 여인의 이야기다. 제주에 크나큰 기근이 들었을 때, 그녀는 전 재산을 털어 쌀 삼백 석을 제주도민들에게 나눠주었다. 때는 정조 18년(1794). 제주 목사 심낙수 는 조정에 급한 장계를 올린다. “바람이 강하게 불어 돌과 기와가 마치 나뭇잎처럼 날리더니, 곡식이 바다 의 짠물에 김치를 담근 듯 피해를 입고 말았습니다. 제 주를 덮친 흉년이 고금에 드문 것이라 구호미 2만 섬 을 긴급 요청합니다.” 조정에서는 구호미를 제주에 보 내기로 한다. 그러나, 곡식을 싣고 출발한 배가 그만 풍랑에 침몰하면서 곡식의 반 이상이 바다에 가라앉고 만다. 천신만고 끝에 구호미가 도착했지만 죽어가는 백성들을 살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아사자는 날 마다 늘어갔다. 이때 나선 사람이 산지항에서 객주를 운영하던 행수 김만덕이었다. 바로 우리가 떠올려 다 시 이야기하려는 여인이다.
어린 시절 너무도 가난하여 기녀가 되어야 했던 김만 덕. 영민했던 그녀는 스무 살에 행수기녀가 되었고, 스 물 넷이 되던 해에는 양인 신분을 회복하고 물산객주 를 차려 장사를 시작한다. 제주에서 나는 물건을 육지 에 팔고, 제주에 필요한 물건들을 육지에서 가져오는 유통업이었다. 김만덕은 박리다매(薄利多賣), 정가매 매(定價賣買), 신용본위(信用本位)의 장사원칙을 고 수하며 큰 돈을 벌었다. ‘거상’이라 불리며 막대한 부 를 쌓았음에도 ‘풍년에는 흉년을 생각해 절약하고, 편 안하게 사는 사람은 고생하는 사람을 생각해 하늘의 은덕에 감사하며 검소하게 살아야한다’는 생활철학 을 실천하며 이웃의 어려움을 외면하지 않았다. 하여 김만덕은 조선시대 최초로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한 부자로 기려진다. 김만덕은 줄곧 쌀 기부로 가난한 백성들을 도왔고, 특히 갑인 년 흉년 당시 그녀 덕분에 목숨을 건진 사람들이 수천 명이 넘었다. 쌀이 거의 생산 되지 않았던 당시의 제주도에서 쌀은 현재의 쌀 가격과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막대한 가치였으리라. 그럼에도 김만덕은 때를 가리지 않고 구휼에 힘썼다고 전해진다. 김 만덕의 선행을 들은 정조는 그녀에게 큰 상을 내리려 한다. 하지만 김만덕은 왕의 상 을 사양하고 다른 소원을 말한다. 육지로 올라가 금강산 구경을 하고 싶다는 것. 김 만덕이 굳이 금강산을 보고 싶다면 청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당시 제주도민들은 ‘출륙금지령’으로 인해 마음대로 육지로 나갈 수 없었다. 나라에서 부과하는 해삼, 전복 같은 공물이 과도하여 많은 제주도민이 육지로 도망을 간 탓이었다. 김만덕이 금강산 구경을 소원한 것은 출륙금지령에 대한 그녀만의 비판이었다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김만덕이 시대의 한계에 굴하지 않고, 불합리한 규범에 맞서 새로운 것에 도전하는 개척자라고 칭해지는 이유다. 김만덕의 소원을 전해들은 정조는 금강산 구경뿐 아니라 한양과 궁궐 구경도 허락한다. 직접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벼슬 을 내리고 임금을 알현할 수 있는 영광까지 주었다. 또 영의정을 지낸 채제공에게 김 만덕의 선행을 담은 전기까지 지으라 했으니, 정조 임금 또한 김만덕의 공덕이 역사 에 길이 남겨질 이야기임을 알았던 것이리라. 김만덕은 혼인을 하지 않고 양자를 들 였고, 74세로 세상을 떠나면서 재산의 대부분을 제주도민을 위해 기부했다고 한다. 훗날 제주도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 ‘은광연세(恩光 衍世, 은혜로운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는 편액을 써주기도 했다.
기녀에서 거상으로, 거상에서 다시 자선사업가로 이름을 남긴 김만덕. 그녀의 나눔 과 봉사정신에서 비롯된 은혜로운 에너지가 21세기 제주를 넘어 한반도에 널리널리 알려지고, 이제 세계로 퍼져나가고 있다. 앞으로는 새로 지어진 ‘김만덕 기념관’이 그 파수꾼 역할을 해 나갈 것이다.
김만덕 기념관 건립은 (사)김만덕기념사업회의 지속적인 노력과 더불어 지역 주민의 폭넓은 공감대 속에 진행되었다. 특히 도시재생을 위해서는 미술관, 박물관, 전시 공간 등 문화시설 확충에 대한 기대가 높기 때문에, 문화컨텐츠 측면에서도 김만덕 기념관은 호응도가 상당히 높았다.
김만덕 기념관이 들어선 건입동은 제주시의 원도심 지역이었다. 제주목이 있던 중심지로 서 제주읍성의 흔적과 유적이 남아 있다. 근현대사에 있어서 중요한 시설물들도 산재해 있어 문화역사자원이 풍부한 지역이다. 그러나 신도시가 생기면서 젊은이들이 하나 둘 빠져나가고, 차츰 주민의 고령화가 이어지더니 생활공간도 노후해져 여기저기 쇠퇴의 흔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특히 슬럼화로 인해 사회적 문제까지 대두되면서 도시재생 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었다. 그러던 차에 전해진 탐라문화광장 조성사업에 주 민들의 기대와 관심이 쏠리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탐라문화광장 조성사업은 산지천 일 대 4만 5845㎡에 842억 원(공공사업비 490억 원, 민자 352억 원)을 들여 생태하천, 테마 정원, 세계음식테마거리 등을 만드는 사업으로, 김만덕 기념관 건립을 비롯해 금산수원 지 생태공원, 김만덕 객주터 복원 등도 탐라문화광장 조성사업이라는 큰 틀 안에서 이루 어졌다. 특히 제주 외항으로 들어오는 크루즈 관광객들이 한 시간 내로 도보관광을 즐 길 수 있도록 조성할 계획이어서 주변의 관광 컨텐츠들이 재정비될 수 있는 기회로 여겨 졌다. 제주를 찾는 크루즈 관광객들은 지난 2012년부터 가파른 증가세를 보이고 있다. 2012년 14만, 2013년 38만 6,000명, 2014년에는 59만 명, 올해에는 65만 명이 찾을 것 으로 예상되고 있다.
아직은 그 모습이 명확히 드러나지 않았지만, 유럽의 근사한 크루즈 기항지처럼 여 유롭게 항구를 거니는 여행객들의 모습을 상상해 볼 수 있을 것이다. 제주의 자연석 으로 외관을 장식한 김만덕 기념관은 그 근사한 사진 속에 한 장면을 가장 먼저 완 성시켰다. 한편, (사)김만덕기념사업회의 활동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1970년대부터 문화계, 학계, 기업인, 재경도민회 등 뜻있는 인사들이 김만덕의 나눔과 희생정신을 알리고 계승하기 위해 발족한 (사)김만덕기념사업회는 김만덕 선양사업을 매년 추 진해 오고 있다. 1980년부터 김만덕상 시상 및 만덕제를 봉행하고 있으며 김만덕 나 눔쌀 만섬 쌓기 행사, 김만덕 국가표준영정 제작은 물론 김만덕 관련 전국 국제 학 술대회와 워크숍, 토론회 등을 꾸준히 진행해 오고 있다. 특히 지역사회를 넘어 베트 남 만덕칸호아학교 설립 등 김만덕 정신을 세계에 알리는 작업도 펼치고 있다. (사) 김만덕기념사업회는 김만덕 기념관 건립의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건의하였고, 2010 년 지방선거를 앞두고 각 도지사 후보에게 ‘김만덕 기념관 건립’을 내건 정책 공약을 제안하기도 했다. 김만덕 기념관 건립은 이같은 (사)김만덕기념사업회의 꾸준한 노 력과 더불어 지역 주민의 폭넓은 공감대 속에 진행되었다. 특히 도시재생을 위해서 는 미술관, 박물관, 전시 공간 등 문화시설 확충에 대한 기대가 높기 때문에, 문화컨 텐츠 측면에서도 김만덕 기념관은 호응도가 상당히 높았다.
2015년 5월 29일, 김만덕 기념관이 성대하게 개관을 알렸다. 2013년 12월 공사를 시 작한지 1년 5개월 만이다. 원희룡 제주도지사, 구성제 제주도의회 의장, 정운찬 전 총 리, 고두심 (사)김만덕기념사업회 상임대표와 기관장 등이 참석했다. 이날 개관식에 는 여느 문화시설의 오픈 행사에서는 볼 수 없었던 뜻 깊은 장면이 있었다. 개관식에 는 보통 꽃과 난 등 축하의 의미를 담은 많은 선물들이 도착하는데 김만덕 기념관 개 관에는 꽃이 아니라 쌀이 넘쳐났다. 꽃이 아니라 쌀을 받자는 아이디어는 쌀 기부로 표상되는 김만덕의 정신을 관객들과 함께 나누고자 함이었다. 이 날 모아진 쌀이 2 천 6백 킬로그램이나 되었다. 기념관은 2천 킬로그램을 지정기관에 기탁하고, 제주시 에 6백 킬로그램을 기부했다. 김만덕 기념관은 앞으로도 방문객들이 편하게 쌀을 기 부할 수 있도록 1층 로비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공간에 쌀 기부공간을 마련해 두었다. 김만덕 기념관은 이처럼 1층에 나눔 기부공간을 두었고, 2층은 체험관, 3층은 전시 실로 구성되어 있다. 김만덕의 일생, 쌀 기부와 관련된 에피소드, 기업가로서의 김만 덕, 나눔 실천가로서의 김만덕 등 그녀의 풀 스토리가 각종 자료와 멀티미디어를 통 해 생생하게 재현되어 있다. 조선시대 제주도민들의 생활상과 제주의 특산품, 당시 제주도 객주에서 취급한 물건들도 볼 수 있다.
김만덕 기념관이니 김만덕을 기리는 이야기가 주가 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별 도로 마련된 ‘나눔실천관’을 주목해 보자.
이 곳에서는 나눔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사람과 물건, 생명까지도 나눌 수 있는 나 눔의 스펙트럼에 대해 자세히 알아볼 수 있다. 제주도 자원봉사 지도, 재능 기부 등 언제, 어떻게, 어떤 방식으로 나눔에 참여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도 소개되어 있 다. 더불어 OX형식으로 구성된 게임판에서 나의 나눔지수를 체크하고, 나눔약속 타 임캡슐에 나의 나눔에 대한 약속과 맹세를 남겨둘 수 있으며, 나눔사전을 함께 만드 는 체험도 가능하다. 게임을 즐기듯 나눔을 자연스럽게 실천할 수 있도록 구성해 놓 은 것이다. ‘나눔’이 컨셉이 아니라 ‘나눔 체험’이 컨셉인 셈이다. 나눔과 봉사에 대한정보는 어디서든 만날 수 있지만 나눔을 체계적으로 체험하는 곳은 찾기 힘들다. “김만덕 기념관은 단순히 김만덕의 전시공간이 아니라 전국 유일의 나눔과 봉사 체 험 및 교육공간으로, 사회적 약자와 취약계층에 대한 배려와 기부, 봉사 프로그램이 운영되는 체험공간입니다.” 김만덕 기념관 초대 관장을 맡을 김상훈 관장의 설명이 다. 안내 동선을 따라 체험 컨텐츠를 경험하면서 실제로 어린 아이가 되어 체험 프로 그램에 참여하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였다. 나눔 캡슐에 직접 새겨 넣은 약속 때문에 라도 기필코 나눔을 실천해야겠다는 각오가 서기도 했다. ‘체험’은 그만큼 파급력이 대단한 경험이다. 김만덕 기념관에 들러 나눔을 체험한 어린 학생들이 하나 둘 나눔 을 실천하게 된다면 ‘은광연세’의 에너지가 더 커지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김만덕 기념관 건립에 또 한가지 특이한 점은 문화시설 관련 과에서 사업을 주관한 것이 아니라 여성정책과에서 했다는 점이다. 박물관이나 기념관 건립을 여성가족정 책과에서 하는 것은 꽤나 희귀한 일이다. 돌 많고 바람 많고 여자 많다는 제주도에 서 여성가족정책과의 업무가 특수한 기능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예상되지만 기술 파트의 일이 많은 기념관 건립까지 맡았다는 것이 특이하다. 그도 그럴 것이 제주도 에서는 지금까지 ‘김만덕’이라는 이름이 붙은 일은 여성가족정책과의 일이라는 수식 이 붙어 있었다. 제주 여성으로서 대표성을 띈 김만덕의 일이다 보니 당연하게 받아들였다. 그러나 기념관 건립은 “처음 하는 일”이었다. 여성가족정책과의 오금자 계 장은 34년 공무원 생활을 한 베테랑이었지만 이번 일은 무척 힘들었다고 토로했다. “처음 하는 업무였어요. 그렇지만 몰랐던 업무이기 때문에 더 많이 자문을 구하고, 발로 뛰면서 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내 전문 분야가 아니기 때문에 전문가의 의견 에 더 열심히 귀를 기울였고 그러다 보니 애착이 많이 가는 사업이었어요.”
이번 사업을 진행하면서 여성가족정책과는 행정직 뿐 아니라 별도로 건축직 직원 이 상주하는 형태가 되었다. 여성가족정책과는 건축직 직원의 보강으로 기술 문제 를 해결해 나가는 한편, 학예사, 민속학자, 역사학자 등 9인으로 구성된 자문위원들 과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구축하였다. 기념관 내부 컨텐츠를 구성할 때는 수십 차례 의 원탁회의를 거쳐 아이디어를 도출해내고 또 수정해 나갔다. 그럼에도 우여곡절 의 연속이었다. 기본 계획 당시에 정해졌던 사업 부지가 변경되면서 사업이 지연되기 도 했고, 예산 집행이 늦어져 다른 사업의 예산을 먼저 끌어 오기도 했다. 첫 삽을 떼 는 순간까지도 신경써야 할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오금자 계장은 자문위원 이나 지역위원들이 ‘이건 아니다’라는 말만 해도 밤잠을 설쳤다고 한다. “지역 주민 들이 저만 보이면 멀리서부터 달려와서 이것 저것 요구사항들을 얘기하셨어요. 지역 주민들 모두가 감독관처럼 느껴졌어요. 그만큼 이 지역에서 관심도가 높은 사업이 었습니다.” 주민들의 의견개진이 너무 많아서 오금자 계장은 “전문가 얘기를 중심으 로 가지치기를 해야 했다”고 말할 정도였다. 드디어 개관식을 맞이하던 날, 오금자 계장은 벅찬 마음으로 기념관에 도착했다. 10시 개관식이 알려져 있었음에도 아침 8 시부터 지역 주민들이 기념관 앞에 모여 있었다고 한다. “잘 했다”고 칭찬해 주는 노 인들도 있었다. 그 간의 노고가 한 순간에 보람과 자부심으로 바뀌는 순간이었다.
지가가 상승하고 상권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주변에 있던 옛날 건물들도 옛 정취를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다. 김만덕 객주터, 물사랑기념관, 아라리오 뮤지엄 카페 등과 연계되는 문화예술 관광 벨트화 계획이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김만덕 기념관이 세워지면서 가장 달라진 점은 역시 ‘도시재생’이다. 지가가 상승하 고 상권이 활성화되고 있다는 소식이 들린다. 기념관이 들어서면서 문화예술 공간 으로 변모될 모습에 지역주민들이 상당한 기대를 하고 있다는 방증이다. 주변에 있 던 옛날 건물들도 옛 정취를 그대로 살려 리모델링이 진행 중이다. 몇 몇 건물들은 문화예술인들의 작업 공간으로 재 조성될 예정이다. 지금은 한참 공사 중이라 차들 이 오고 가지만 기념관 주변은 ‘차 없는 거리’로 만들어지고 있다. 주차장도 200미터 떨어진 곳에 공동주차장만 이용 가능하다. 김만덕 객주터, 물사랑기념관, 아라리오 뮤지엄 카페 등과 연계되는 문화예술 관광 벨트화 계획이 차근차근 실현되고 있는 것이다. 오금자 계장은 확언하듯 건입동의 미래를 전망했다.
“노령화, 노후화로 많이 침체되어 있었지만 이제 젊은이들이 많이 찾아오는 거리가 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2~3년 내로 제주에서 제일 성공한 동네가 될 것입니다.” 김만덕 기념관은 이제부터가 진짜 시작이다. 기념관은 제주특별자치도에서 직영 관 리를 할 계획이었으나 기념관 운영의 전문성과 운영효율화를 위해 지난 4월 (사)김 만덕기념사업회에 위탁 경영을 맡겼다. 민간에 위탁되면서 새롭게 전문 경영인 출신 의 관장님을 모셨다. 초대 관장을 맡은 김상훈 관장은 경영인 출신답게 기념관의 기 본 모토를 고수하면서도 합리적 수익 창출을 위한 방안을 모색하고 있다.
“저는 33년 동안 돈 버는 일을 했습니다. 이제 기업 경영이 아니라 나눔과 봉사로써 사회에 기여하는 일을 하고 싶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눔과 봉사의 표상인 김만덕 의 정신을 널리 알릴 수 있는 일을 하게 됐다는 것은 참으로 고마운 일입니다. 나눔정신 뿐 아니라 그 분의 개방 개척 정신, 경영 철학도 세계에 알리면서 기념관이 나눔 봉사의 센터가 되도록 만들 계획입니다.”
제주동문수산시장은 전통시장 특유의 제주수산물을 경쟁력으로 중앙로 상점가, 지하상가, 칠성로 상점가 등의 주변상권과 제주탐라국의 문화유산을 그대로 간직 한 삼성혈, 목관아지, 오현단, 산지천 등 시장을 찾는 고객 취향에 어울리는 전통시 장의 역할을 하고 있으며, 공항(10분), 여객선 터미널(5분) 등 관광객이 시장을 방문 할 수 있는 교통편의 시설이 동반된 제주시 중심상권으로 활성화 되고 있다. 특히 2006년도 전국재래시장 박람회에서 최우수시장, 최우수점포 선정 등 전국단위 상 권별 경쟁력에 있어서도 상위권에 속해있으며 ‘맞춤전문식당(고객이 시장에서 상품 을 직접 골라서 식당에서 입맛에 맞는 요리로 음식을 즐길 수 있는 식당)’이라는 독 특한 시장운영으로 관광객이 즐겨 찾는 먹거리, 즐길거리가 가득한 전통시장이다.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중앙로13길 16-12
제주시동문수산시장상인회 (이도일동)
064-752-8959
http://ds.market.jeju.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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